추억의 파노라마가 펼쳐지는
철원 역사문화공원과 소이산 모노레일
지난 9월 말, 철원.
때 묻지 않은 창창한 하늘, 소슬히 불어오는 가을바람과 찬연한 가을볕은 철원평야를 그 여느 때보다 더 드넓게 만들고 있었다. 발 닿는 곳곳이 온전한 가을로 곱게 물들던 날, 철원읍 사요리(四要里)를 찾았다.
# 1930년대 철원을 만나다
얼마나 많은 포탄과 총탄이 이곳을 스쳤던 걸까. 포탄 자국으로 건물 전체가 검게 그을린 노동당
사가 서글피 다가온다. 그 건너편 광장 한가운데 높이 솟아 있는 오정포(午正砲). ‘아직도 포 소리로 시간을 알리는 마을이 있나.’ 서둘러 돌린 눈길이 광장 입구 팻말 앞에 멈춰 섰다.
철.원.역.사.문.화.공.원.
지난 7월28일, 철원군이 국비 226억 원을 투입하여 6년의 산고 끝에 대중에 공개한 근현대 역사 유적 공원이다. 한국전쟁 이후 일부 건물 잔해만 남아 있던 소이산(362m) 자락, 7만1,226㎡ 부지에 구한말을 소환한 20동 건물들을 세워 옛 철원읍 시가지를 재현해놓았다. 일제의 수탈과 한국전쟁의 아픔을 되돌아볼 수 있는 의미 있는 곳으로 개장 보름 만에 이미 1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사실 철원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8만 인구로 강릉, 원주와 함께 강원도 3대 도시였습니다. 기록을 보면 철원역엔 서울 용산과 북한 원산을 잇는 경원선(221.4㎞) 기차와 학생들이 수학여행 때 오른 금강산전기철도(116.6㎞)가 있어 연간 28만 명이 오갔다고 합니다. 이 때문에 철원읍 일대는 여관, 극장, 학교, 양장점, 은행, 우편국, 대형 의원 등 주요시설들로 빼곡했지요.” 취재를 동행한 이덕재 팀장(철원군청)의 이야기가 꽤 재미있다.
공원 안, 멍들어 거멓게 변한 당대 상황을 대변하는 듯 한글, 한자, 히라가나가 뒤섞인 약제 포스터들이 약국 벽을 시커멓게 뒤덮고 있다. 수탈을 위해 설립된 근대 금융기관 ‘철원금융조합’, 광복 당시 2천6백여 명 학생들로 북적이던 ‘철원공립보통학교’ 의 교실 광경도 실감 나게 재연돼 보는 내내 가슴 뭉클 피어오른 감정들로 목구멍이 콱 틀어 막힌 듯했다.
무성영화가 상영 중이던 철원극장, ‘한국 근대 단편 소설의 완성자’라 불리는 이태준 작가(산명리)의 소설 ‘촌뜨기’를 극화한 연극이 곧 무대에 오른다는 말에 그 시절 모던 보이라도 된 것 마냥 기대감에 부풀었다.
일제 치하가 없었다면, 한국전쟁이 발발하지 않았다면 과연 지금 철원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꼬리를 문 물음이 쉽사리 떠나지 않는다. 그렇게 더딘 발걸음이 공원 끝자락 철원역에 닿았다.
# 지뢰밭 평화의 숲, 소이산에 놓인 모노레일
실제 1km 떨어진 외촌리에 있는 폐역 철원역사(驛舍)는 약 16만5천㎡ (5만 평) 규모로 구내에근무한 역무원만 80명이 넘었다고 한다. 연간 수하물 6만3천여 톤을 싣고 서울, 원산, 금강산을 향했던 기찻길은 이제 모노레일 철도가 깔리며 하루 20회 소이산 정상을 오가고 있다.
병풍처럼 공원 뒤편에 펼쳐진 소이산은 예부터 군사적 요충지로 산 전체가 철원의 역사를 그대로 드러낸다. 고려시대부터 외적의 침입을 알리던 제1로 봉수대가 있었고, 광복과 동시에 북한 지역에 속했다가 한국전쟁 때 수복되어 곳곳에 벙커와 미군 레이더 기지가 자리한 유서 깊은 곳이다. (향토문화전자대전)
지뢰밭, 민간인통제구역이었던 소이산에 출입이 허가된 건 불과 10년 전.
민ㆍ관ㆍ군이 오랜 시간 힘을 합쳐 2012년 ‘소이산 생태숲 녹색길’(4.8km)을 마련했고, 여기에 철원군이 평화 관광 활성화 사업의 일환으로 사업비 48억 원을 투입해 ‘소이산 지뢰꽃길 모노레일’ 조성을 추진, 2여 년의 노고 끝에 지난 7월 왕복 1.8km 모노레일을 더했다.
LTE 자동 무인시스템으로 8명 탑승객을 안전하게 정상까지 안내하는 모노레일에 몸을 실었다. 긴 듯 짧은 듯 정상을 향한 15분, 창밖 푸스스한 가을 풀숲이 청량하게 스친다. 곧 마주할 장관은 또 어떠할지 차오르는 기대감에 온몸이 근질거린다.
드디어 정상. 평야 한가운데 솟은 산이라 그런지 고산에 오른 듯한 기분이 든다.
“저기 보이는 저수지가 1920년대 축조했던 산명호입니다. 그 끝 지점에 빨간 지붕 건물들이 좌우로 2km씩 떨어져 있는데 이 구간을 이은 철조망이 바로 남방한계선입니다. 그 선을 넘으면 DMZ이지요! 그 안에 있는 저 얕은 산속 건물이 GP입니다. 그 뒤를 쭉 넘어 난 길이 보이나요? 북방한계선입니다. 그곳부터 북한인 거죠.” 한탄강 지질공원 유병기 해설사가 휘젓는 지침 봉을 따라 눈길이 분주히 움직인다.
백마고지(395m), 일명 김일성 고지라 불리는 고암산(780m), 월정리역(흥원리), 처절한 쟁탈전으로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렸다는 삽슬봉(219m), 가을에 봐야 제맛이라는 재송평 황금 들녘과 북한 평강고원 풍광까지 이제 들멍 시작이다. 그저 무심히 오랫동안 눈 앞에 펼쳐진 파노라마 비경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이런 장소에서는 사진 찍는 것도 부질없이 느껴진다.
한걸음 뗄 때마다 역사를 마주하는 곳. 한걸음 옮길 때마다 자연을 만나는 곳.
자연의 섭리와 역사의 자취가 찬란히 숨 쉬고 있는 감성 진한 철원이 감빛으로 여물고 있다.
● 철원 역사문화공원. 철원읍 금강산로 262. 070-7374-6401.
운영시간 : 9:00 ~ 18:00(동절기 12월~2월 17시까지 단축 운영), 휴관 매주 화요일, 명절 연휴 이용요금 : 무료
● 소이산 모노레일 : 성인 5천원, 청소년 3천원, 어린이 2천원 (입장권 구매 시 철원사랑상품권 증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