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랑 파랑(波浪) 동해 동호지구,
도시재생 뉴딜사업으로 다시 날개 펴다
묵호가 빛나던 그 시절 이야기를 간직한 마을이 있습니다.
동호동(東湖洞). 삼척의 무연탄, 양양의 철광석, 동해안의 수산물을 나르며 동해 제1의 어업 전진기지로 호황을 누렸던 묵호항, 그 바로 왼편에 아담하게 자리한 마을입니다. 묵호의 번영을 함께했지만, 원도심의 배후동네여서 주거환경이 상대적으로 기울었던 곳. 그 타이틀을 벗기고 보면 모래 속 진주처럼 곳곳이 알알이 반짝이는 동네입니다.
오래되어 더 매력적인 것들, 낡고 오래된 물건이 보물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마을이라고 할까요. 낮은 산봉우리들이 겹겹이 둘러있는 경사진 마을을 찬찬히 돌라본 느낌이 그러했습니다. 큼지막이 깨끗하게 정비된 동네 길, 나지막한 언덕으로 이어진 산책로, 색색 지붕에 옹기종기 모여있는 시골집들까지. 오래돼 보이지만 상투적이지 않아 걸음걸음 산뜻함이 감돕니다. 발한공원 상부 ‘바닷가책방마을 커뮤니티 센터’에서 바라본 열차가 흐르는 묵호역 동해는 마치 만화 속에나 있을 법한 평화로운 어촌 모습 딱 그 자체였지요.
동호동의 새 이름, ‘바닷가 책방 마을’. 그 이름이 마법 주문처럼 지난 시절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합니다. 먼지 쌓여 쿰쿰하지만, 그리 기분 나쁘지 않은 오래된 책들로 가득한 중고 책방에 들어서는 듯 말입니다. 1층 북라운지와 곧 문을 열 마을 디저트 카페를 지나 2층 교육실에서 김홍비 사무국장을 조우했습니다. 그리고 손에 쥐어진 마을 소개 책자. 책장 사이로 과거 마을 동편 일대에 묵호역 기차를 기다리며 사람들이 애용한 책방, 만화방, 신문사, 인쇄소가 늘어서 있었다는 기록을 읽고, 조심스레 책방 마을 탄생 내막을 가늠해보았습니다. 센터가 있는 발한공원 한편에 시립도서관도 큼지막하게 자리하며 묵호의 빛바랜 향기를 머금고 있으니 ‘애써 한 짐작이 틀리진 않겠구나’ 확신이 더합니다.
이 단초들을 모아 책방 마을 이야기를 더 들어보았습니다. 동네가 지금처럼 깔끔하게 정돈된 것이 불과 1년이 채 안 됐다는 말은 믿기 힘들었습니다. 동호동은 2017년 국토교통부 도시재생 뉴딜사업 ‘우리동네 살리기’에 최종 선정되며 국비 80억 원, 시비 80억 원이 투입, ‘책을 읽고 만드는 행복한 재생 공동체’를 위한 대대적 정비가 시작됐습니다.
무엇보다 시급했던 건 주민들의 생활 인프라와 주거환경 개선이었습니다. 좁은 언덕길로 제한적인 주민들의 이동 동선은 곧 소통 공간의 부재로 이어졌고, 공동체 형성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마을을 관통하는 소방도로를 개설하니 곧 차량 통행이 가능해졌고, 주민들의 동선이 확장되자 이전에 할 수 없던 노후 주택 정비와 난방 연료 공급이 이뤄졌습니다.
경사면 골목을 따라 빼곡히 늘어선 30년 넘은 107세대 낡은 집들은 오랜 세월 묵은 때를 벗고 알록달록 색색의 옷으로 갈아 입었습니다. 새로 쌓은 담장, 형형의 강판 지붕들은 낮게 깔린 바다 풍경에 더해져 넘치도록 시적인 풍경을 자아냅니다. 마을 빈터는 어린이 놀이터와 조형물 공원으로 변모하여 도란도란 둘러 모일 수 있는 공간이 됐습니다. 동호동에서 삶을 지속하는 주거환경을 만들고자 마련한 공공 임대주택 8개 호에는 마을로 돌아온 주민 세대와 새로 이주한 청년 창업가들이 입주해 살고 있습니다. 빈집 3개 동은 로컬 스테이 공간으로 재생, 작년 8월 시범 운영한 체험단으로부터 재방문이란 호평을 받은건 예상된 결말이었습니다.
그렇게 4년의 노력 끝에 지난해 10월 19일, 마을 준공을 알리며 그 날개를 다시 활짝 펼쳤습니다.
민간전문가의 참여도 힘을 보탰습니다. 동해시는 마을재생 사업의 지속을 위해 마을과 기업이 상생할 수 있는 ‘파란발전소’를 구상, 30년 넘게 전 세계 100여 국에서 연필을 수집한 이인기 디자이너(㈜디자인소호 대표)의 ‘책과 연필, 새롭게 만나는 바다’사업제안을 받아들여, 지난해 11월 동해시 첫 박물관이자 국내 최초 연필 테마 박물관인 ‘연필뮤지엄’을 개관했습니다.
묵호역 사거리 마을 어귀 부근에 세워진 연면적 800㎡ 4층 규모의 박물관 안에는 이 디자이너가 소장하고 있는 연필 6천여 자루 중 2,500여 자루가 전시돼 있습니다. 잠깐 둘러본다는 것이 연필 구경에 푹 빠져 아주 구석구석까지 살펴보았습니다. 형형색색 연필들이 신기할 정도로 서로 잘 어우러진 것이 또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4층 카페 통유리 너머 건넛마을 묵호등대와 논골담길의 눈부신 절경이 시원히 다가옵니다. 마을 조명들이 듬성듬성 별처럼 반짝이는 밤이 되면 그 감동이 더할 것 같아, 야간에도 개장해달라고 무리 아닌 요청을 해보았습니다. 카페에서 만난 이 디자이너는 “면적 0.02㎡ 연필 안에 담겨있는 무수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었다”며 “관람객들이 연필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창의성을 기르고, 사물의 소중함을 느끼고, 더 나아가 직업의 가치, 멋진 직업관을 갖게 유도하는 게 궁극적 목표”라고 덧붙입니다.
뜨거움이 살짝 가라앉은 여름밤, 시원한 음료와 잠깐의 인사로 충전돼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
그동안 잊고 있던 보통의 풍경과 다시 꽃피운 평범한 일상의 이야기가 바닷가 책방 마을에 흐르고 있습니다. 먼 길을 걸어도 지루해질 틈이 없는 동해의 동쪽 마을, 걸음마다 잊고 있던 과거로의 풍경들을 떠오르게 하는, 기분 좋을 수밖에 없는 이 마을이 어쩐지 올여름 내내 생각날 것 같습니다.
동호지구 바닷가책방마을 커뮤니티 센터 지리2길20. https://blog.naver.com/dhdhbook. 033-535-2216.
파란발전소 연필뮤지엄 발한로 183-6. www.pencilmuseum.co.kr. 033-532-1010.
운영시간 : 10:00~18:00(매주 화요일 휴관) 입장료 7,000원(동해시민·어린이4,500원)
Tip
청량리역을 기준으로 ‘서울~동해 KTX-이음’ 열차에 탑승 2시간이면 묵호역에 도착한다. 묵호역에서 발한공원 방면 400m 거리에 연필뮤지엄이 있다. 박물관 뒤편으로 2분여 걸어 오르면 동해시립발한도서관과 바닷가책방마을 커뮤니티 센터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