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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

원주 치악산의 영원산성 길

  • Date.2016-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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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850m

2미터 높이의 성벽

원주 치악산 영원산성 길

국립공원지정 이후 처음 모습을 드러내다

    

 

영원산성.

 

모처럼 찾은 그날 첫눈이 내렸다.

독야청청 솟아 언뜻 보기에도 100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소나무 숲 사이로 드러난 영원사는 가느다란 눈 발아래 마치 영화의 한 장면으로 동공으로 각인되었다.

 

 

올해 영원사 복원을 앞두고 두 달에 한번 꼴로 오르락내리락 했던 터라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데 눈 오는 날의 운치는 제법 낭만적이었다.
 

치악의 옛 이름은 적악(赤岳)이다. 원주의 동쪽을 병풍처럼 감싸고 있는 치악산맥의 남서쪽에 자리 잡은 영원산성은 가을이면 온 산에 물드는 붉은 단풍이 아름다워 적악 이라고 불리다가 조선시대에 들어서 치악(雉嶽)으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다

 

은혜 갚은 꿩 전설에서 유래하니 생명을 존중하고 은혜를 소중히 여기는 원주인의 심성이 담겨있다.

오르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시 도심 북동쪽 끝자락인 관설동 섶재 마을에서 길아치 넘어 계곡을 따라 올라 산성의 북문으로 향하면 가장 빠르지만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험하다

 

전쟁으로 산성으로 피해야 할 때 이용된 길로 추정하는 데 원주 시가의 모습이 잘 내려다보인다.

 

領願山城

    

 

 

다른 길은 금대계곡을 지나 영원사를 끼고 지난다. 영원산성을 거쳐 남대봉까지 걷는 코스다.

지난 10월 첫 개방을 앞두고 탐방로를 정비해서 산성에 이르는 길은 멀지 않은 길이지만 가파르다

 

초행길인 사람들에게는 자칫하면 45도 정도 경사로 느껴질 법하다. 특히나 산성의 석축들은 그대로 복원되어 밟을 때마다 돌들이 움직인다.

 

 

 

출발한지 40여분. 어느새 산성 남벽 끝자락에 닿았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치악산금대분소의 김완영 소장과 더불어 원주시가 산성의 둘레길 개방을 위해 오랫동안 노력해 정비가 잘 된 덕분이다. 해발 850m. 2m 정도의 성벽이 오롯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떻게 이곳까지 이런 산성을 쌓을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필연적이다.

선조들의 위업을 다시 한 번 느낄 뿐이다.

 

 

 

국가 사적 제447호이기도 한 영원산성

남으로 길게 뻗은 적악 치악산의 산맥은 북원경을 병풍처럼 감싸고 이 험난한 산줄기에 돌을 모아 성을 쌓았으니 쉽게 범하기 어려운 요새였던 셈이다

 

신라인에게 적악은 요충지였을 터이고 외침으로부터 나라를 지키고 왕조를 유지하기 위한 국방 시설의 면모를 거침없이 드러낸다.

      

675년 신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제압하고 삼국을 통일한다. 당의 힘을 빌려 어렵게 통일의 대업을 이루긴 하였으나 한반도의 동남쪽 귀퉁이에 자리한 왕도경주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옛 땅을 다스리기에는 힘겨웠다.

 

통일신라는 지방제도를 개편하여 나라 안 요충지에 경주를 대신할 작은 서울소경을 설치한다

 

금관경을 비롯해서 남원경(남원), 서원경(청주), 중원경(충주), 북원경(원주) 등 신라 오경이다. 새로 설치된 오경에는 왕족과 귀족들을 보내서 옛 고구려와 백제의 백성들과 융화하며 다스리게 하였다

 

영원산성을 처음 쌓은 것도 이 무렵이라고 전한다.

 

       

 

원산성의 성벽 둘레는 2.2km, 남문과 북문, 동문 3개의 문 터가 남아 있다. 대부분 산성은 허물어져 흔적만 남았지만 성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이어지는 남동성벽 일부 구간은 높이 2m 정도의 성벽이 원행대로 잘 남아 있어 원래 성의 형태와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이번에 개방된 코스 중 하나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둘레가 3,749, 성 안에 우물 1곳과 샘 5곳이 있었다고 전한다. 최근 발굴조사에서 1곳의 샘터를 찾았다.

 

 

전쟁과 관련된 의미 있는 역사도 있다

 

1291(충렬황 17) 몽고의 일족인 합단의 무리가 침입하였을 때, 원주의 향공진사(鄕貢進士) 원충갑(元沖甲)10여 차례에 걸쳐 싸워 영원산성을 지켰다.

      

패한 합단은 철군하여 돌아갔다. 당시 충렬왕은 강화도로 피신하고 원주 북쪽의 영토가 전부 합단에 점령당하였으니 고려가 처한 최대의 위기였다

 

전쟁이 끝난 후 충렬왕은 나라를 구한 공로로 원주 주민에게 3년 동안 조세와 부역을 면제해주었다.

 

 

두 번째는 1592년 임진왜란 때, 원주목사 김제갑(金悌甲)이 왜군 장수 모리 요시나라(森吉成)가 이끄는 군사와 맞서 싸우다 산성이 함락되면서 아들 김시백(金詩伯), 부인 이씨(李氏)와 함께 순절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두 시간 남짓이면 보은의 전설이 살아있기도 하고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담긴 치악산의 면면을 느낄 수 있는 사계절이 아름다운 곳이라고 강조하는 김 소장의 전언이 허언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여행 정보

주변 볼거리: 영원산성의 수호 시찰로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영원사. 선조 임금의 장인(인목대비의 아버지,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부원군 김제남이 계축옥사로 일족이 모두 죽임을 당할 때 손자인 천석, 군석 형제가 영원사로 피해 목숨을 구했다는 사연이 전해진다. 금대계곡은 계국이 맑고 깨끗한데다가 남치악산의 장쾌한 능선을 볼 수 있는 곳이다. 금대 에코 힐링 캠핑장(033-763-5232, 원주시 판부면 영원산성길 372)의 명상의 숲, 에코힐링 트레일 코스가 인기 있다.

 

+문의 국립공원치악산 금대분소 033-763-5232

 

 

 

 

 

: 박종수 학예연구사 · 조은노

사진 : 주민욱 월간 사람과 산 기자

촬영협조 : 조인수 주임, 국립공원 치악산 금대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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